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 무타즈 (문단 편집) == 즉위 이전 == [[파일:1280px-Abbasids_Ninth_Century_svg.png]] 9세기 후반 칼리파 가계도 (알 무타심 ~ 알 무타미드) 본래 알 무타와킬은 세 아들에게 차례로 칼리파에 즉위할 것을 장려하였다. 그는 장남 문타시르에게 자지라 (사마라)와 이집트를, 차남 무타즈에게 이란 (타히르 조)을, 삼남 무아야드에게 시리아 통치권으 주었다. 사남인 탈하 (알 무와파크)와 막내인 아흐마드 ([[알 무타미드]])는 어린 나이 때문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한편, 시간이 흐르며 무타와킬은 생각을 바꾸어 야심이 많았고 아랍 엘리트 층의 지지를 받던 차남 무타즈를 단독 후계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장남 문타시르를 지지하던 튀르크-마그레브 용병들은 칼리파 암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861년 10월) 그리고 그해 12월 5일, 무타즈가 라마단 종식을 알리는 금요 예배를 이끌었고 9일에는 무타와킬이 장남 문타시르를 죽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결국 10-11일 밤에 거사가 일어나 무타와킬이 살해되었고 문타시르가 즉위하였다. 이후 알 문타시르는 동생들을 소집하여 충성 서약 (바이야)을 명령하였다. 한편, 무타와킬의 와지르였던 우바이둘라는 궁전을 탈출하여 무타즈의 거처로 갔으나 그는 이미 문타시르에게 소환된 상태였고, 대신 수천에 달하는 무타즈의 친위대[* 주로 압바스 혁명을 일으킨 호라산 출신 아랍인들의 후예]와 마주쳤다. 그들은 문타시르의 궁전으로 쳐들어가려 하였는데, 우바이둘라는 '우리의 주군이 그의 수중에 있다'며 그들을 무마시켰다. 862년 4월 27일에 무타즈와 무아야드는 계승권 포기 각서에 서명하였다. 하지만 두달 후에 문타시르가 급사하며 무타즈에게 재차 기회가 온듯 하였으나 튀르크 정권은 그의 사촌인 알 무스타인을 추대하였다. 이에 사마라 시민들과 페르시아인 군대가 봉기하였으나 튀르크 군에게 진압되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무스타인은 무타즈와 무아야드에게 연간 8만 디나르의 연금을 주며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내 생각을 바꿔 그들의 재산[* 알 타바리에 의하면 무타즈의 재산은 천만 디르함에 이르렀다고 한다]을 몰수하고 자우사크 궁전에 감금시켰다. 여론을 의식한 정권에 의해 겨우 목숨을 부지했을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